입향조 검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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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정보>해평 입향조 검재공

시조 문성공 7세 주손이신 검재공檢齋公(휘 수지水智) 해평 입향조께선 자字는 윤보潤甫 호는 검재儉齋 증도승지贈都承旨 증직을 받으신 분으로서 경암敬庵 허조許稠의 문인門人으로서 세종 29년(1447년)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에서 생원시 1등으로 급제하시고 단종端宗 1년(1453년)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에 급제하시고 입조立朝하셔서 옥당응교(玉堂應敎)등 여러 벼슬을 거쳐 말년엔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내셨으며 손자인 송정공(휘 應龍응용)의 귀로 홍문관,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증직 받으셨다. 세조3년 1457년 10월 사헌부 감찰 때 정조사正朝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가셨을 때 명나라 황제가 상사賞賜한 문장정종文章正宗 및 주자서안朱子書案과 용연龍硯중 주자서안은 해평에 전해지고 있으나 용연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검재공께서 1428년 사천에서 태어 나셔서 함평모씨咸平牟氏와의 사이에 장남이신 군수공 휘 이식以湜을 낳으셨으며 비안현감比安縣監으로 부임 도중에 해평에서 해평김씨 김영발金英發의 손녀인 해평김씨海平金氏와 재혼하셔서 처향인 해평이 속한 선산이 명현을 많이 배출한 추로지향(鄒魯之鄕)이고, 해평의 강산을 좋아하셔서 해평으로 거처를 옮기시게 되었는데, 문성공文成公 7세 주손胄孫이었기에 거처를 옮기시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옮기신 걸로 봐선 나름 충분한 사연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해평으로 이거한 후 해평김씨와의 사이에 차남 이회以淮, 3남 이하以河. 4남 이한以漢 등 3남 2녀를 낳으셨으며 정덕2년正德三年(1508년) 4월 7일에 향년81세로 운명하셨다.(공의 묘비기록) 공께서 해평김씨와 재혼을 하시고 해평으로 이거한 시기가 성종조(1469 ~ 1494) 때인 거로만 알려지고 있는 바 정확한 시기는 알 수가 없으나 1480년 ~ 1485년 사이가 아닐까 추정 합니다.

진양지晉陽志(광해군 14 ~ 32년에 성여신成汝臣 등이 편찬한 경상도 진주晉州 읍지)에는 '崔應敎水智居康洲宰比安時兼任善山來往於海平縣見有江山之勝(槩)卜居焉基長子郡守以湜尙在康洲至是欲從搬移干海平及到洛東江遇颶風颺丹無以渡以湜以謂親命也不敢遽止來而復往凡三次風浪如初終不得利涉而止응교최수지崔水智가 강주康洲(진주의 옛이름)에 거주하면서 비안현감을 겸임할 때 선산을 오가다가 해평현 강산이 너무 좋아 그곳에 거할 때 장자인 군수공 최이식崔以湜이 아직도 강주康洲에 있더니 이때에 와서 선공先公이 거주하는 해평으로 반이搬移(이사를 뜻함)코자 하여 낙동강에 이르러서 돌풍이 일어 강을 건너지 못하자 부친의 명이라 여겼지만 감히 단념하지 못하고 왔다 가기를 3번이나 하였지만 풍랑이 처음과 같으므로 부득이 발길을 그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검재공께서 비안현감으로 부임하실 때 우기라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넘쳐흘러 가족과 함께 가지 못하시고 단신으로 부임지에 가셨으며 가족은 처가 곳인 함안咸安 안인 安仁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설도 전하여지고 있다. 위의 두가지 전해지는 얘기로 봐선 장남인 군수공께서도 부친을 따라 해평으로 이주를 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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