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애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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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애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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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북애고택



해평마을 한 가운데 두 채의 큰 기와집 가운데 오른쪽에 위치한 집 즉 마을에선 오랫동안 '서울댁'이란 택호로 불리워지고 있는 집이 북애고택이다.

북애고택 사랑채의 상량문에 '숭정기원후3무신4월초2일崇禎紀元後三戊申四月初二日'로 적혀 있는 걸로 봐선 정조 2년 1788년에 지어진 것은 분명하다. 이 집은 원래 농수재공聾睡齋公(휘 광익光翊)의 작은 아드님이신 문학공文學公(휘 승우昇羽)의 살림집으로 지어 졌으나 후에 형인 화은공花隱公(휘 성우成羽)께서 사시던 쌍암고택과 집을 바꾸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여러가지 정황으로 봐선 농수재공의 두 아드님이 각각의 집에 사시다가 집을 서로 바꾼 것이 아니고 애초에는 작은 아드님인 문학공의 살림집으로 지어 졌으나 집이 완공되자 큰 아드님인 화은공께서 그 집으로 입주를 하시게 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전주최씨 해평문중에선 집안마다 안주인이 바뀌게 되면 바뀐 안주인의 택호를 따라서 택호를 달리 부르는게 일반적인데, 이 집의 경우에는 안주인의 택호가 '계남댁', '각산댁' 등이 있었음에도 언제부터인가 대대로 '서울댁'으로 불리워 왔는데, 그렇게 불리워지는 연유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조23년(1799년)에 화은공花隱公(성우成羽)의 외숙이신 유학자 연안인延安人 이승연李承延어른께서 지으신 농수재공 행장行狀 내용 말미에 '成羽今在洛中走書千里求之甚懇(성우금재낙중주서천리구지심간)'이라는 내용 즉 '성우가 지금 서울에 있으면서 천리길에 편지를 달려 보내 몹시 간절하게 이를 구하니'란 내용으로 봐선 1799년 당시에는 화은공께서 서울에 거주하고 계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화은공께선 그로부터 3년 후인 1802년에 돌아 가셨는데, 공의 묘소가 김천 개령에 소재한 걸로 봐선 돌아 가시기 전에 해평으로 귀향하신 후 돌아가신 걸로 추측할 수가 있다. 즉 화은공께서 서울에서 사시다가 해평으로 귀향하신 것은 분명한 바 그때부터 북애고택이 '서울댁'으로 불리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까지 이 집은 화은공의 후손 종친들이 살아 오면서 집이 잘 관리, 유지되고 있으며 전주최씨 인재공파 해평문중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해평마을엔 이런 집이 한 채 더 있었는데, 골안에 있었던 '화도댁'으로 불린 인재공 종택이었지만 아깝게도 유지가 되지 못하고 멸실되고 말았다. 과거에는 해평마을에 이런 규모의 해평문중의 기와집이 9채나 들어서 있었다니 그 당시의 위세를 상상만 해볼 뿐 아쉽게도 지금은 쌍암고택과 북애고택 두 채만 남아 있다.

문화재청의 자료에는 이 집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아래와 같이 남아 있다.

지정번호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1호
지정연도 : 1983년 6월 20일
소재지 : 경북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318번지
시대 : 조선시대
분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소유주 : 최우석

조선 정조 12년(1788)에 농수재 최광익(聾睡齋 崔光翊:1731~1795)이 둘째 아들인 최승우(崔昇羽:1770~1841)를 위해 지었으나 그 형인 최성우(崔成羽:1762~1802)와 집을 바꾸었다고 전한다.

'북애北厓'라는 명칭은 건너편에 위치한 쌍암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05호)에서 이 집을 바라볼 때 북쪽 언덕에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一자형 사랑채와 중문간채, ㄷ자형 안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었는데, 쌍암고가와 같은 형식이다. 원래는 대문간채와 사당도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사랑채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서쪽에는 2칸의 사랑방을 두고, 동쪽에는 대청 그 뒤로는 마루방을 두었다.

중문간채는 앞면 7칸·옆면 1칸인 一자형 집으로 오른쪽부터 헛간·고방·마루·창고가 있고 가장 왼쪽에 중대문이 있다. 중문간채와 마주한 안채는 6칸 대청을 중앙에 두고 동북쪽에 골방이, 앞쪽에 안방과 2칸의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부엌 위에는 안방에서 출입할 수 있는 다락이 있으며 마루를 깔았다. 대청의 남서쪽에는 3칸의 상방과 그 앞 동쪽으로 2칸의 안사랑과 1칸의 마루를 두었다. 마루는 전면이 남쪽으로 개방되어 있고 안마당과 중문간 쪽으로는 벽체를 세웠는데, 안마당 쪽으로 시선이 가지 않도록 한 점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아래는 이 집에 대한 또 다른 자료이다.

본 가옥은 영(英)·정조(正祖) 시대의 실학자인 최광익(崔光翊)이 둘째아들 승우(昇羽)의 살림집으로 정조 12년(1788)에 지었으나 그 형인 성우(成羽)와 집을 바꾸었다. 원래 살던 쌍암고가(雙岩古家)에서 북쪽 언덕에 있다하여 북애고택이라 한다. 건립 연대는 1788년이며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이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5칸, 'H'자형 맛배지붕으로 이루어졌고 중문채는 정면 7칸, 좌측면 1칸, 우측면 2칸, S형 맛배지붕이고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편주 3개, 환주 2개 우물 천정으로 이루어진 고가이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口자'형 안채와 '一자'형 중문간채가 '튼 口자'형을 이루고 동북향으로 앉아 있다. 그 앞쪽에 一자형 사랑채가 따로 있다. 대문간채와 사당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안채는 안마당 정면에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건넌방, 마루방, 안사랑방, 안사랑 대청이, 우측에는 찻방, 안방, 부엌, 통로 문간이 뒤에서부터 앞으로 뻗어 있다. 중문간채는 좌로부터 중문간, 고방, 장고방, 마루, 고방, 헛간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구성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사랑채의 상량문에 숭정기원후 삼무신사월 초2일 오시 입주라고 기록되어 있어 1788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고 옛날에는 대문채와 사랑도 있었다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터만 남아 있다. 본 가옥을 북애고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길 건너 중요민속자료 105호 쌍암고가의 동생 집이라는데서 연유된다. 쌍암고가에서 형이 살면서 동생에게 집을 지어주고 바라보니, 북쪽 언덕에 있다고 하여 북애고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고가의 몇가지 특이한 면을 보면, 평탄한 대지 조건으로 건물의 배치 방위에 대한 환경적인 제약을 받을 만한 사항이 없는데도 안채 중심인 대청을 동북으로 배치하여 시원하게 하였으며 안방, 부엌, 건넌방, 안사랑 등이 전부 동남으로 향하게 함으로 '□'자형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조(채광) 불량에서 벗어나 밝은 실내 공간을 만들고 그러면서 사랑채와 사랑마당 안사랑채와 안사랑마당 안채와 안마당 등의 내외 공간구분을 엄격하게 유지하고 사랑채 뒷부분에 장지문을 달아서 필요하면 마루방으로 쓸 수 있게 한 점도 보기 드문 수법이라 하겠으며, 특히 사랑채의 뜰을 쌓은 전돌은 매우 훌륭한 수작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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